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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 전철 여행기/1~4호선

342. 양재역 - 외교사료관



양재역에 왔습니다.


3호선과 신분당선이 만나는 환승역이고, 역 위에는 강남대로와 남부순환로가 교차해 붐비지만


낮에는 비교적 한산한 모습입니다.





양재역 부역명은 서초구청인데요.


양재역 근처에는 서초구청 이외에도 외교부 산하 국립외교원, 외교센터가 있습니다.





오늘은 여기에 있는 외교사료관을 보러 왔습니다.





국립외교원은 외부인 출입을 통제하는 곳이라


출입구에 신분증을 맏기고 방문증을 받아 안으로 들어갑니다.





언덕을 걸어 외교사료관에 도착했습니다.


외관만 보면 박물관보다는 콘도같은 느낌이 듭니다.





관람객이 볼 수 있는 공간은 1층 외교사전시실이 전부인 것 같네요.





전시실로 들어가기 전 밖에 걸린 '사진으로 보는 외교현장' 패널을 본 뒤 안으로 들어갑니다.





전시실 입구에는 1876년 체결한 최초의 근대조약 강화도조약부터


2013년 정부조직개편에 따라 외교통상부가 외교부로 개편되기까지의 한국 외교사 연표가 걸려 있는데요.





가장 먼저 보이는 사료는 강화도조약이 아니라 조미수호통상조약입니다.


이유를 추측해 보자면 현재 한국 외교에서 가장 중요한 국가가 미국이고,


강화도조약 이전에도 외교적 교류가 있던 일본과는 달리


미국은 처음 외교 활동을 벌인 서양 국가라서인 것 같네요.





1882년에 맺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은 서양과 맺은 최초의 조약이자


처음으로 최혜국 대우 조항을 넣은 조약이라는 의의가 있습니다.





조약을 맺고 1년 뒤 조선은 미국에 보빙사라는 사절단을 파견했습니다.


미국이 조선에 외교대사를 파견했으니 조선도 외교관을 파견해야 하지만


이제 막 국제사회에 발을 내민 조선으로서는 그럴 능력이 안돼서 대신 사절단을 보낸 것이죠.


민영익, 홍영식, 서광범이 사절단으로 미국을 방문했고, 그외에 유길준이 수행원으로 함께 갔습니다.





보빙사 사진 옆에는 대한제국 주미 한국 공사관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스타벅스 코리아가 열심히 텀블러를 팔면서 알리고 있는 건물이죠.





미국과 조약을 맺은 뒤 조선은 영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프랑스 등 서구 열강과 잇달아 조약을 맺습니다.


대부분은 청의 알선으로 조약을 맺었는데


러시아는 조선이 청의 알선 없이 독자적으로 외교 관계를 맺었습니다.


청은 오래전부터 러시아와 국경 분쟁을 겪으며 동북아 일대에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우려했고,


러시아가 2차 아편전쟁 중재 과정에서 연해주를 차지하면서 국경을 접하게 되자 이런 경각심은 더 커졌는데


청나라는 끝내 두 나라가 조약을 맺는 것을 막지 못했죠.


재밌는 사실은 두 나라 사이를 이은 사람이 청이 조선 내정 간섭을 위해 파견한 묄렌도르프라는 점입니다.





일본과 맺은 조약은 별도로 공간을 할애해 전시하고 있습니다.





1876년 맺은 조일수호조규, 일명 강화도조약 이후


조선과 일제는 부록, 무역규칙, 조일통상장정 등의 조약을 지속적으로 맺었습니다.





대한제국 시절에도 일제가 여러 차례 조약을 맺으면서 대한제국이 가진 권한을 뺏어갔는데,


그 시작은 1904년 러일전쟁 발발 후 맺은 한일의정서입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황실의 안녕을 보장하는 대신 일본편을 들어달라는 내용이 담긴 조약입니다.





하지만 일제는 1년 뒤 을사늑약을 맺으며 대한제국 외교권을 빼앗았고


대한제국은 국제사회에서 목소리를 낼 힘이 사라졌습니다.





고종은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했지만


일제의 방해로 회의장에 들어가지도 못해 실패로 끝났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죠.





이후 1910년 이완용과 테라우치 마사타케가 서명한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면서 


한국은 35년간의 식민지배를 겪게 됩니다.





일제와의 외교 이외에 대한제국과 관련된 외교사료로 이민과 관련된 사료가 전시되고 있습니다.


1902년 12월 22일 대한제국 정부가 하와이에 이민단을 보낸 뒤 세계 여러 나라에 이민단을 보냈는데


그중 한 국가가 멕시코입니다.


한인들이 제법 많이 건너간건지 멕시코에서도 숭무학교 설립과 같은 한국 독립운동 흔적을 찾을 수 있죠.





벽에는 멕시코로 건너간 이민자가 쓴 대한제국 여권이 걸려 있습니다.





광복을 맞이한 한국은 외교 무대에 얼굴을 들이밀 겨를도 없이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6.25 전쟁이 소모전 양상을 띄면서 미국은 휴전을 논의하게 됐는데


이승만 정부는 처음에는 휴전을 반대했지만 미군 주둔, 경제 원조를 조건으로 휴전을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휴전협정서에는 북한, 중국, 미국 담당자가 서명을 했지만 남한은 휴전협정서에 서명하지 않았죠.





휴전 협정이 맺어지고 3개월 뒤 한미 양국은 상호방위조약을 맺어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게 됩니다.





미국과의 조약 이후 한국 외교사에서 중요한 사건을 꼽자면


1965년 맺은 한일기본관계조약을 들 수 있습니다.


미국은 지속적으로 한국에게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요구했지만


이제 막 일본으로부터 독립한 나라에게 일본과의 수교는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죠.


1964년 6월 3일 한일 국교 정상화에 반대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났지만


결국 1965년 박정희 정권은 한일기본관계조약을 맺었습니다.


이 협약과 관련해서 무수히 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지만 이 이야기는 여기서 다루기엔 너무 기니 생략.





아무튼 이 협약 이후 양 국가간 정상은 양 국가를 오가며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박정희, 전두환에 이어 집권한 노태우 시절에는 공산권 국가와 수교를 연달아 맺었습니다.


이건 공산권 붕괴로 인한 개혁/개방 물결 덕분이지만


1992년 맺은 중국과의 수교는 1983년 중공 여객기 불시착 사건이 큰 영향을 미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대만으로 망명을 시도한 6명이 비행기를 납치해 춘천시에 있던 미군 기지 '캠프 페이지'에 불시착한 사건으로


6.25 전쟁 이후 어떠한 외교적 교류가 없던 한국과 중국이


인질범과 인질, 비행기 처리를 두고 처음으로 만났다는 의의가 있습니다.


이 사건 이후 한국과 중국은 가까워졌지만 반대로 한국과 대만은 서서히 멀어져 결국 단교하게 됐죠.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사이 이념경쟁이 사라졌으니 한국은 북한과의 통일을 위한 외교 노력을 기울입니다.


특히 김영삼 대통령 때는 남북정상회담 실현 직전까지 왔는데 김일성이 사망하는 바람에 물거품이 됐죠.





결국 최초의 남북정삼회담은 김대중 대통령때 이뤄졌습니다.


회담 결과 6.15 남북공동선언이 나왔는데,


이 선언이 나온 6월 15일은 남북을 잇는 고려항공 비행기 편명(JS615)에 자주 사용되곤 합니다.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항공은 광복절에서 따와 KE815/OZ815를 사용하죠.





국민의 정부에 이어 들어선 참여정부 시절에도 남북정상회담이 열렸습니다.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이 평양에서 만나 10.4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했는데,


정권 말미다 보니 6.15 선언에 비해 파급력이 크지 않았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두 번의 남북정상회담 이후 올해 문재인 대통령이 판문점에서 김정은과 만나 판문점 선언을 발표했는데


이번에는 좋은 결과가 나올까요?





이어서 한국과 유엔과의 관계에 대한 전시물이 나옵니다.





한국은 UN의 승인을 받아 세워진 한반도 합법 정부라는 정통성을 내세운데다


6.25 전쟁 때 UN군의 지원을 받았기에 UN에 가입하려고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소련을 위시한 공산권의 반대로 UN 가입이 번번히 무산됐죠.


 그래서 참관국 자격으로 유엔총회에 참석은 하되 표결권은 행사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공산권이 무너지는 가운데 소련과 정식으로 수교관계를 맺은데다


중국과도 수교는 하지 않았지만 관계가 좋아졌기에 1991년 9월 17일 유엔 가입에 성공했습니다.


특히 이날 남북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했기에 외교사적으로는 물론 남북관계에 있어서도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비상임이사국으로 선출되거나 한국인 사무총장을 배출하기도 하는 등


한국은 유엔 내에서 다양한 활동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외교관 활동과 관련된 전시물이 나옵니다.


외교관이 상대국에 파견돼서 정상을 만나거나 할 때 이런저런 기념품을 받곤 합니다.


보통 그 나라의 전통과 관련된 기념품을 많이 받는 것 같습니다.





이외에 훈장같은 상을 받기도 하는데


법적으로는 국가공무원법에 규정된 바에 따라


외국정부로부터 영예 또는 증여를 받을 경우에는 대통령의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별 문제가 없으면 외교관에게 다시 돌려주겠지만 말이죠.


여기에 전시된 기념품과 훈장은 당사자로부터 기증받은 물건입니다.





이어서 여러 여권이 나옵니다.


1951년에 발행한 여권은 대한제국 여권처럼 큰 종이롤 만들었네요.





1981년에 개정된 여권은 지금보다 세로 길이가 긴 모습입니다.





지금 쓰고 있는 여권은 1988년 개정된 디자인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2008년부터 전자여권을 발급해서 여권에 전자여권 로고가 박힌 것을 제외하면 차이가 없죠.


2020년부터 새로운 디자인을 한 여권이 나온다고 해서 화제가 됐는데,


지금 여권은 좀 수수하고 투박해서 새 여권 실물이 기대가 됩니다.





이어서 외교관이 쓰는 물품이 나오는데요.





외교관이 부여받는 특권과 관련된 물건이 몇 가지 보입니다.


이건 외교행낭이라 해서 본국과 상대국에 있는 대사관 사이에 보내는 물품이나 서류를 넣는 가방이죠.


외교행낭은 세관 검사를 거치지 않고, 해당국의 동의 없이는 개봉할 수 없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걸 악용해서 북한이 밀수를 한다거나 위조지폐를 유통한다거나 하는 문제가 있지만.





외교관이 타는 차는 일반적인 차량번호가 아닌 외교관용 차량번호를 씁니다.


그래서 차를 타는 사람이 외교관이라는 것을 다른 사람이 쉽게 알아보게 하죠.


외교관 차량 번호판 자체는 특권과는 상관이 없지만


외교관이 저지른 주정차 위반이나 과속과 같은 범죄는


경찰이 그 자리에서 범죄행위를 확인해도 일단 풀어주고 대사관에 항의해야 한다는 점에서


외교관의 특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외교'사료관이니 국가가 하는 여러 업무 중 '외교' 한 분야에 대해서만 다루고 있지만


한국 근현대사를 고루 훓어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만큼 한국 근현대사에서 외세가 미친 영향이 크다는 것이겠죠.


국제화 시대에 외교가 미치는 힘이 줄어들지 않을테니


미래에 여기에 전시될 사료 역시 이런 느낌이 강하게 들 것 같습니다.





상설 전시는 이것으로 끝인데,


평창올림픽 개최를 기념해서 올림픽유치외교 특별전시가 조그맣게 열리고 있습니다.





두 번의 올림픽을 개최하기 위해





어떤 외교적 노력을 벌였는지를 연표를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1988 서울 올림픽과 관련해서는 기념우표나 뱃지를 전시하고 있고,





2018 평창 동계올림픽과 관련해서는 기념우표와 큰 인기를 끈 마스코트 인형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특히 메달리스트에게 제공되는 마스코트 인형은 어사화 색이 다른 한정판으로 제공돼서 화제가 됐죠.


이 수호랑 인형은 스켈레톤 국가대표 윤성빈 선수가 받은 인형입니다.





일반인들에게 판매된 인형은 이렇게 어사화 색이 금은동으로 칠해진 인형이죠.





여자 피겨스케이팅 국가대표 최다빈 선수가 신었던 스케이트화를 보고 외교사료관을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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