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도권 전철 여행기/5~9호선

533. 광화문역 -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만난 흥선대원군



5호선 광화문역에 왔습니다.


실제 광화문은 역에서 조금 떨어져 있지만,


세종대로와 종로, 새문안로가 교차하는 세종대로 사거리 일대도 뭉뚱그려 광화문으로 부르곤 하죠.





새문안로 방향을 보니 얼마 전 개통한 종로-새문안로 중앙버스전용차로가 보입니다.





이날 목적지는 서울역사박물관입니다.


얼마전 운현궁을 관람했을 때 서울역사박물관 운현궁 기획전 포스터를 봐서 이 전시를 보러 왔죠.


하지만 박물관 개관 시각은 오전 9시인데, 광화문역에 도착한 시간은 8시입니다.





개관 시각까지 시간이 좀 남으니 근처에서 아침을 먹기로 했습니다.


새문안로에서 조금 안쪽으로 들어가면 주변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식당과 술집이 많죠.


예전에 광화문 근처에 있던 보험계리사 학원을 다닐 때에는 저도 여기서 밥을 먹곤 했습니다.





그중 가장 자주 갔던 순대국밥집을 찾았습니다.





여기서 파는 순댓국의 특징이라면 순댓국이 나올 때 이미 양념이 풀어져 나온다는 것과


다른 곳에 비해 곱창이 많이 들어간다는 점이죠.


다른 고기를 먹을 때에 비해 보다 쫄깃한 식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개관 시각을 10여분 앞두고 서울역사박물관에 도착했습니다.


시간이 조금 남으니 박물관 밖에 놓인 유물을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박물관 앞에 놓인 다리는 경희궁 앞에 있던 금천교입니다.


경희궁의 정문 흥화문 앞에는 금천이라는 하천이 있었는데 하천을 건너기 위해 다리가 놓인 것이죠.


경희궁은 일제강점기때 가장 많이 훼손된 궁궐인데,


경희궁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금천교가 서울역사박물관 앞에 복원됐습니다.


정작 서울역사박물관 자체가 경희궁 자리에 세워져서 경희궁 복원을 막고 있는데.......





박물관 앞에는 단청이 칠해진 콘크리트 구조물이 여럿 보입니다.


바로 광화문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철거된 옛 광화문 부재죠.


일제는 조선총독부를 짓기 위해 광화문을 국립민속박물관이 있는 곳으로 옮겼습니다.


6.25전쟁 때 광화문 문루가 파괴되면서 1968년 광화문을 복원하게 됐는데


당시에는 문화재를 복원할 때 콘크리트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라

(석굴암 보수 과정에도 콘크리트가 사용됐죠.)


광화문 복원에도 콘크리트가 사용됐습니다.


하지만 이때에는 조선총독부 건물을 중앙청으로 활용하고 있었기에


중앙청을 건드리지 않고 복원하기 위해 광화문이 원래 자리에서 조금 비뚤어진 자리에 놓이게 됐습니다.


김영삼 정부때 중앙청을 헐면서 광화문을 원래 자리에 복원해야 한다는 의견이 높아졌고


2007년 7월 광화문 복원을 위해 광화문을 헐면서 콘크리트 부재가 서울역사박물관에 놓이게 됐습니다.


지금 경복궁에 놓인 광화문은 소나무와 화강암을 사용해 복원했는데,


지금도 현판 문제로 시끄러운 것을 보면 참 다사다난한 문화재입니다.





박물관 주변 구경은 이정도로 하고 기획전시실로 이동했습니다.


서울역사박물관은 흥선대원군의 후손 이청에게 운현궁과 관련된 여러 유물을 기증받아


흥선대원군, 운현궁 관련 유물이 상당히 많습니다.


운현궁 기획전은 이 유물과 더불어 다른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흥선대원군 관련 유물을 모아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일대기, 그리고 그가 살던 구한말 시기를 보여주는 전시입니다.





전시실 한쪽 벽에는 이하응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주요 사건을 설명한 연표가 놓여있습니다.


다른 전시에 비해 연표가 참 긴데, 그만큼 그가 살았던 시대가 혼란스러웠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의 이름이 운현궁인만큼 우선 운현궁에 대한 소개와 함께 운현궁을 다루고 있는 유물이 보입니다.


가장 왼쪽의 지도는 수선전도라는 지도인데, 운현궁이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하는 지도이고,


가운데는 운현궁이라는 명칭을 처음 언급한 실록, 고종실록입니다.


오른쪽은 황현이 저술한 역사 기록인 매천야록인데, 운현궁이 여러 번 언급돼


당시 흥선대원군의 권력이 얼마나 컸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그의 권력을 느낄 수 있는 또다른 요소는 바로 운현궁의 크기입니다.


권세와 집 크기는 비례하는데, 옛날에는 일본문화관과 덕성여자대학교 자리까지 전부 운현궁이었습니다.





오늘날 운현궁 부지에 남은 건물은 운현궁 양관을 제외하면 크게 세 건물인데,


우선 노안당에 대한 설명과 함께 이하응이 흥선대원군으로서 행한 업적이 나옵니다.





세도정치로 혼란스러워진 왕권을 바로잡기 위해 대전회통, 육전조례와 같은 법전을 간행하고


왕권을 높이고자 경복궁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당백전을 발행했습니다.





또 붕당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수많은 서원을 철폐했고,


통상을 요구하는 서양 세력에 맞서 척화비를 세우면서 쇄국정책을 펼쳤습니다.


하지만 이런 정책은 여러 반발을 가져왔는데,


특히 서원 철폐는 그동안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지지하던 양반 세력의 반발을 가져와


결국 흥선대원군이 권력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그 뒤에도 짧게나마 권력을 잡게 됩니다.


구식 군대가 별기군과의 차별에 반발해 일으킨 임오군란 때


반란에 가담한 군인들이 흥선대원군을 지도자로 세웠으나


반란 세력이 청 군대에 진압되면서 흥선대원군이 청에 압송돼 권력을 오래 잡지는 못했습니다.


이후 갑오개혁 초기 일본이 개혁 반대 세력의 반발을 누그러뜨리고자


흥선대원군을 일종의 얼굴 마담으로 세워 개혁을 진행하려고 했으나


흥선대원군은 갑오개혁 당시 일어난 동학동민운동을 이용해 권력을 공고히 다지려고 했기에


농민 세력을 진압한 일본에 의해 다시 자리에서 내려오게 됩니다.





임오군란 진압 과정에서 청 군대에 압송된 흥선대원군은 중국으로 건너가 사실상 연금 생활을 지내게 됩니다.


조선으로 돌아갈 생각은 꿈도 못꾸던 것이죠.


하지만 민씨 정권이 조선에서 영향력이 커진 청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이려 하자


이것을 견제하고자 흥선대원군을 도로 조선으로 돌려보내게 됩니다.




이 시절 흥선대원군과 관련된 중국쪽 기록과, 유배 시절 대원군이 그린 난초 그림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이어서 나오는 전시물은 운현궁의 권력이 어디서 나오는가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하응이 단순히 왕의 아버지, 즉 대원군이라는 이유만으로는 권력을 행사할 수 없었겠죠.


정치적인 힘과 경제적 부가 같이 맞물려야 그에 걸맞은 권력을 지닐 수 있을 겁니다.


이 전시에서는 조선시대 토지대장인 양안을 통해 운현궁이 토지를 가져가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논밭을 소유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면세 혜택까지 누려 왕실 재정 일부분으로 간주된 것 같다는군요.





운현궁이 가지고 있던 토지를 보면 말 그대로 전국 방방곳곳에 퍼져 있습니다.





이어서 나오는 전시물은 바로 가례도감의궤입니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결혼식, 즉 가례가 바로 운현궁에서 열렸죠.


비록 운현궁이 고종이 태어난 장소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왕의 결혼식이 사택에서 열렸다는 점에서


흥선대원군의 힘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후 흥선대원군 노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사실 대원군의 말년은 그다지 좋지는 않습니다.


을미사변 당시 흥선대원군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사건에 관여한 뒤로


고종과 흥선대원군 사이는 틀어질대로 틀어져


아관파천 이후 고종이 대원군존봉의절을 발표해 대원군은 또다시 연금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그러다 1897년 12월 16일 대원군의 아내 부대부인이 먼저 세상을 떠나고


곧이어 1898년 2월 2일 대원군도 세상을 떠나죠.





사이가 좋지 않았으니 고종은 흥선대원군의 장례식에 참여하지도 않았지만


대신 장례식은 국장으로 치러졌습니다.


이후 1907년 대원군과 부대부인을 왕과 왕비로 추봉하게 됐죠.


추봉식이 1907년 8월에 진행됐다고 하는데, 이때는 일제가 고종을 하야시키고 순종을 즉위시키던 시기니


고종이 원해서 추봉하게 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장례식 이후 흥선대원군의 무덤은 여러 번 이장을 했는데, 지금은 남양주시 화도읍에 무덤(흥원)이 있습니다.





전시실에는 흥선대원군의 생애와 관련된 전시물 이외에도 흥선대원군과 관련된 유물이 많습니다.


그가 그린 그림, 그가 사용한 도장, 그가 쓴 글 등이 있죠.





개인적으로 눈길이 가던 그림은 책가도 병풍입니다.


책가도는 조선 후기에 많이 그려지던 그림으로,


풍경, 풍속 등 현실을 묘사한 그림과는 다르게 개인의 취미를 보여주고 자랑하기 위해 그린 그림이죠.


조선 후기에는 서화나 골동품을 수집하는 취미가 유행했기에


흥선대원군 역시 이런 그림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데,


그림 앞에 놓인 안내문에 의하면 수진보작(壽進寶酌)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소라 모양 술잔이


그림 우측 하단에 그려진 것이 특징이라고 합니다.


이 술잔은 경복궁 중건 공사 도중 발견된 술잔으로, 왕실의 장수를 기원하는 시가 적혀 있어


이를 상서럽게 여긴 고종이 흥선대원군에게 바쳤기 때문이죠.





흥선대원군의 욕심에 대한 설명도 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여러 별장을 가졌는데, 그 중 하나인 석파정에 대한 일화가 적혀 있습니다.


석파정의 원래 주인인 김흥근이 집을 팔지 않자 저 집을 가지기 위해 왕을 이용해 결국 집을 빼앗았다는


매천야록의 기록을 인용해 설명하고 있죠.


그야말로 왕의 아버지였기에 할 수 있던 공작입니다.





기획전시실을 나와 기증전시실 4관으로 이동했습니다.


앞서 운현궁의 주인이던 이청이 서울시에 여러 유물을 기증했다고 말했는데,


기증전시실 4관에는 운현궁, 특히 운현궁 양관에서 사용하던 식기, 가구 등 여러 집기를 전시하고 있습니다.





운현궁 양관은 오늘날 덕성여자대학교 평생교육원이 사용하고 있어 아무나 들어가지 못하기에


이곳에서 영상을 통해 간접적으로 관람해볼 수 있습니다.





양관에서 사용하던 물건들은 이름에 걸맞게 서양식 집기입니다.


그 누구보다 쇄국을 밀어붙였지만 결국 서구화를 막지 못했고,


집안까지 서양식 집기가 침투하게 된 것이 인상적이네요.



(오른쪽 사진은 2016년 1월 6일 촬영했습니다.)



전시전 관람을 마치고 서울역사박물관 옆에 있는 서울전차 381호를 보러 왔는데,


전차가 비닐로 꽁꽁 묶여 공사 중입니다.


내부를 보수하는 것 같네요.


이 글을 공유하기

kakaoTalk facebook twitter na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