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릉역에 왔으니
정릉에 가봐야겠죠.
서울에서 유일하게 승합차로 운행하는 특이한 마을버스 성북05번을 보며 언덕길을 열심히 걸어
정릉에 도착했습니다.
광복절을 맞아 입장료를 안 받고 있길래 매표소는 통과.
재실을 지나
제법 구성이 단순한 정릉 안내도를 보고 무덤으로 갑니다.
원래는 재실에서 홍살문을 거쳐 가는 길이 있는데
관리사무소 신축 공사 때문에 조금 돌아서 갑니다.
정릉에 묻힌 사람은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입니다.
이 결혼부터가 조금 골 때리는 게
이성계는 영흥에서 신의왕후 한씨와 결혼을 한 상태에서
중앙 정치에 진출하면서 개경에서 신덕왕후 강씨와 또 결혼을 합니다.
고려 말기의 혼란상 중에 지방 출신 관리가 지방에서 먼저 결혼을 한 뒤에
개경 중앙귀족과 정략결혼을 맺는 일이 있었는데 이성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던 것이죠.
이걸 향처, 경처라고 부르는데 조선 기준은 물론 고려 기준으로도 불법이었지만
신의왕후 한씨가 조선 건국 10개월 전에 사망하는 바람에
신덕왕후 강씨가 별문제 없이 조선의 첫 번째 왕비가 되었습니다.
신덕왕후는 이성계의 7남 이방번과 8남 이방석을 낳았는데
막내아들 이방석을 태조의 세자로 세우는 데 성공하지만
이 과정에서 이방원을 비롯한 신의왕후 한씨의 자손들을 적으로 돌리고 맙니다.
그렇다면 오래 살아서 아들을 지켰어야 했는데
신덕왕후 강씨는 아들이 세자로 책봉되고 얼마지나지않아 죽고
오늘날 정동 영국대사관 근처에 묻혔습니다.
묻힐 때까지만 해도 정릉이라는 이름을 붙인 번듯한 왕릉이었지만
1차 왕자의 난을 겪으면서 두 아들은 모조리 살해당했고
태종 즉위 후 무덤을 정동에서 한양도성 바깥인 오늘날의 이 자리로 이장하면서
무덤에 있던 각종 석물은 청계천 다리를 짓는데 써버리고 사실상 평민의 무덤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종묘에 신덕왕후 강씨 위패를 빼버린 건 덤.
한참 시간이 지난 현종 때에야 지위가 복권돼 지금과 같은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나중에 대한제국 선포 이후 고종이 태조를 태조고황제로 추존하면서
신덕왕후도 신덕고황후로 추존해
비각에 있는 신도비에는 대한 신덕고황후 정릉이라고 적혀 있네요.
능침을 가까이 가서 보지는 못하지만
안내 팸플릿에 적힌 설명에 의하면 정릉 능침 주변에 놓인 석물들은 옛 정릉에서 옮겨온 것이라
고려 양식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관련 전공자가 아니라서 조선 양식과 고려 양식이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파란만장한 수난을 겪은 정릉을 둘러보고 나서
정릉의 원찰로 지어진 흥천사를 보러 갑니다.
정릉이 정동에 있던 시절 태조의 명으로 정동에 지어진 흥천사는
170여 칸이나 되는 커다란 사찰이었다는데
정릉 위치가 옮겨진 뒤에도 한동안은 왕실의 뒷배로 그 규모를 유지했지만
중종 5년(1510년) 유생들이 일으킨 화재로 소실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현종 때 정릉이 복권되면서 정릉 근처에 있던 신흥암이라는 암자를 능침사찰로 지정했고
신흥암이 정릉과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위치를 옮기면서 신흥사라는 이름으로 바꿨습니다.
정조 18년(1794년)에 또다시 위치를 옮겼고
고종 2년(1865년) 흥선대원군의 시주를 받아 몇몇 건물을 새로 지으면서 이름을 다시 흥천사로 고쳤습니다.
엄밀히 따지자면 정동 시절 흥천사와 지금의 흥천사는 다른 절이지만
지어진 목적은 같으니 같은 절 역사로 묶고 있네요.
정릉만큼이나 수난을 겪은 절이라서 역사에 비해 오래된 건물은 많지 않지만
이 극락보전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6호로 지정됐고,
그 옆에 있는 명부전은 제67호로 지정됐습니다.
조선 후기 가람 건축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나 보네요.
이와는 별개로 정동 시절 흥천사에 있던 보물 제1460호 홍천사명 동종은
흥천사가 불에 타 없어진 뒤 덕수궁으로 옮겨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절을 차분하게 둘러보고 싶었지만
법당 건축 공사 때문에 절간이 조금 어수선해 사진만 몇 장 찍다 나왔습니다.
수도권 전철 여행기 | ||
S118. 북한산보국문역 북한산 입구만 찍고 유턴 |
S119. 정릉역 | S120. 성신여대입구역 카페 원오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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