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시로에서 삿포로를 잇는 특급 오조라에 승차해
미리 예약해 둔 지정석에 앉아
쿠시로역에서 산 에키벤을 꺼내 먹습니다.
홋카이도산 3대 게 덮밥(北海道産三大蟹 めし)라고 해서
하나사키 게(花咲かに), 홍게(紅すわいがに), 털게(毛がに) 이렇게 3가지 게살을 밥 위에 얹은 도시락이네요.
홋카이도에서 유명한 식재료 중 하나가 현지인은 잘 안 먹는다는 대게인데
대게 대신 다른 게라도 맛을 봅니다.
그러는 사이 열심히 달린 기차는
정차역이 아닌 신요시노역에 갑자기 멈추는 바람에 드디어 사슴이 사고를 친 건가 했는데
다행히 별일 아니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출발하네요.
여행 일정이 상당히 긴데도 열차 시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냥 통과하는 오비히로는
언젠가 다시 와보기로 하고
다시 자연밖에 보이지 않는 풍경을 실컷 보다
남들은 별로 안 내리는 신토쿠역에 내려
삿포로로 가는 열차를 보냅니다.
역에 내렸으니
북쪽 대지의 입장권을 챙기고 나서
다른 교통수단으로 갈아탈 건데요.
다름아닌 JR 대행버스입니다.
네무로역에서 쿠시로역, 오비히로역을 지난 네무로 본선은
신토쿠역에서 삿포로 방향이 아닌 후라노 방향으로 이어졌는데
2016년 홋카이도를 강타한 태풍 라이언록으로 선로가 유실되면서
신토쿠역에서 히가시시카고에역 사이 구간이 불통구간이 돼버렸고
이 구간을 버스가 대행운송하는 식으로 유지를 해왔습니다.
하지만 적자에 시달리는 JR 홋카이도는 복구시켜 봐야 아무도 안 타는 이 구간을 살릴 생각이 없었기에
네무로 본선 연선 주변 지자체와 폐선을 두고 줄다리기를 하다
2024년 4월 1일 신토쿠역 - 후라노역 구간을 통으로 폐선하고 버스로 전환하는 데 합의했고
대행버스마저 사라지기 전에 이 구간을 이용해봐야겠다 해서
굳이 신토쿠역에 내렸네요.
페선 전 기념품 판매에 혈안인 모습을 보고 쓴웃음을 지으면서
JR 홋카이도 적자 해소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려고
아리가토 네무로 본선 붉은색 5호가 달린 철로 기념 입장권 11장 세트를 사기로 했는데
여기서 재미있는 광경을 보게 됐습니다.
JR 창구에서 신용카드로 승차권을 사면
이 승차권은 승차권을 구입한 창구에서만 신용카드를 들고 환불할 수 있다는 표시인
C制 글씨가 인쇄돼서 나오는데요.
감열지 승차권(MARS 승차권)이 아닌 기념 입장권을 사도 이 조건이 똑같아서
기념 입장권 뒷면마다 일일이 C制 도장을 찍은 뒤 이 칸에 신용카드 승인번호를 펜으로 적네요.
흥미로운 광경이지만 괜히 이것 때문에 버스를 놓치지 않을까 조마조마하다
입장권을 받고 역 밖으로 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합니다.
JR 홋카이도 계열 버스회사가 있지만
열차대행 버스는 다른 곳에 위탁을 주네요.
홋카이도 레일 패스를 보여주며 버스에 올라탔는데
시각표대로라면 16시 21분에 출발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약간 늦게 출발했습니다.
강을 따라 달리던 철길과는 다르게
산을 오르면서 신토쿠역 다음 역인 오치아이역으로 이동하는데
이런 데에 도보 중인 사람이 있네요?
어차피 산을 올라야 하니
기차로는 접근하지 못하던 사호로 리조트 호텔에 덤으로 정차하고
험준한 산길을 내려갑니다.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홋카이도에 참 산이 많은데
이런 땅에서 일본에서 재배하는 농산물 대다수가 나온다는 것이 참 신기하네요.
산을 오르내린 버스는
버스 이용객을 위해 불을 켜놨지만
정작 아무도 이용하지 않은 오치아이역을 지나
다음 역인 이쿠토라역을 향해 달립니다.
점점 깊은 시골로 이동하는 동안
해가 저물어가면서 날이 어두워지네요.
저 멀리 빨간 기차가 보이면
이쿠토라역에 도착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쿠토라역 역사에 달린 역명판에는 이쿠토라가 아닌 호로마이역이라는 쌩뚱맞은 역명이 적혀 있는데요.
히로스에 료코 주연 영화 '철도원'의 배경이 이곳 이쿠토라이고
철도원에서는 역명이 이쿠토라가 아닌 호로마이였기에
철도원의 배경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역명을 호로마이로 바꾼 것이죠.
역사 반대편 빨간 기차에 철도원이라고 적힌 헤드마크가 달려 있는 이유도 이것이고.
영화 철도원에서 호로마이역은 석탄 산업이 쇠퇴하면서 결국 폐역이 되는데
실제 역인 이쿠토라역도 폐역이 돼버렸으니 참 얄궂은 운명입니다.
이쿠토라역을 출발한 열차는
야간 슬로프를 개장한 스키장을 지나
다시 어두운 산길을 올라가는데요.
다행히 야생동물을 만나는 불상사 없이
하지만 정해진 시간보다는 조금 늦게
히가시시카고에역에 도착했습니다.
이쿠토라역에서 우르르 탄 승객들과 함께 버스에서 내려
후라노로 가는 열차를 기다리는 동안 역사 대합실을 둘러보니
철길 폐선 뒤의 대비를 착실하게 하고 있네요.
17시 42분 출발하는 후라노행 열차를 타기 위해
대합실에서 나오니
이제 막 기차가 역에 도착했습니다.
이 노선에 엄청난 추억이 있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사라지기 직전의 철도를 이용한다는 것이 괜히 사람을 감상에 젖게 만드네요.
앞이 끊긴 철길과 영원히 끊길 철길을 보고
기차에 올라타 후라노역으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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