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무로역에서 나와 반대편으로 가면
네무로 버스터미널이 나오는데
여기서 일본 최동단 노삿푸미사키로 가는 시내버스 노삿푸선(納沙布線)을 탈 수 있습니다.
당연히 이런 동네는 버스에서 교통카드를 쓰지 못하니
미리 승차권을 사는 것이 좋은데
여기는 왓카나이와는 다르게 왕복 승차권을 산다고 해서 별다른 기념 승차권을 주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기념으로 뭔가 남기고 싶은 사람은 왕복 승차권 1,970엔에 110엔을 더해
2,080엔짜리 1일 승차권을 사라고 적혀 있는데
1일 승차권도 어차피 감열지에 인쇄돼서 나오니 그다지 기념이 되지 않겠다 싶어 왕복 승차권을 샀거든요.
그런데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사실이 있었으니
버스 기사님께 감열지에 인쇄된 1일 승차권을 주면
일반적인 교통패스처럼 두꺼운 종이에 인쇄된 1일 승차권으로 바꿔줍니다.
이걸 보고 엄청 후회했네요.
이미 기회는 물건너갔으니
버스를 타고 대략 40분쯤 이동합니다.
일본 최동단에 있는 동네다 보니
황량한 모습을 생각하고 왔는데
러시아와의 접경지대라서 의도적으로 도시를 키우기라도 한 것인지
도로를 따라 길게 마을이 늘어서서
우체국도 있고 세이코마트도 있고 주유소도 있어서
단순히 사는 것만 따지면 꽤 주거환경이 괜찮을 것 같네요.
곰과 사슴이 문제라면 문제지만.
왕복 2차선 도로를 느긋하게 달린 버스는
네무로역을 출발한 지 40분이 지나
마지막 정류장이자 일본 최동단 버스 정류장인 노삿푸미사키에 도착했습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노삿푸미사키(노삿푸곶)의 상징과도 같은
4도의 가교(四島のかけ橋)를 비롯해서
희망의 종(きぼうの鐘),
최동단 비 같은 기념비를 열심히 찍어보는데
극점에 대한 기념비만큼이나
바다 건너 섬에 대한 조형물이 상당히 많이 보입니다.
하보마이, 시코탄, 쿠나시르, 이투루프.
일본에서 영유권을 주장하는 북방 4도,
실효 지배 중인 러시아에서 부르는 명칭으로는 쿠릴 열도와 가장 가까운 땅이
이곳 노삿푸미사키라서
관련 기념물도 있고 전시 시설도 있네요.
그중 북방관이라는 전시시설이 가까이 있어서
극점 증명서를 받으면서 안을 둘러볼까 했더니
여기서 주는 증명서는 오른쪽 일본 본토 사극 최동단 출발, 방문, 도달 증명서가 아닌
북방영토 시찰 증명서라는 다른 증명서입니다.
일단 주니까 챙기긴 했는데 여기 온 목적은 이게 아니라서
네무로시 북방영토 자료관으로 들어가
여기 온 목적을 달성하고
이건 대체 뭔 짓을 해야 모을 수 있을지 고민하며
천천히 자료관 내부를 둘러봅니다.
한국에서는 독도에 대한 일본의 일방적인 주장이 워낙 중요한 이슈다 보니
일본의 다른 영토 분쟁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편인데
일본 내, 특히 홋카이도 내에서는 쿠릴 열도 분쟁이 상당히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는 섬들은
하보마이(歯舞, 러시아명 하보마이), 시코탄(色丹, 러시아명 시코탄),
쿠나시리(国後, 러시아명 쿠나시르),
그리고 에토로후(択捉, 러시아명 이투루프) 이렇게 4곳입니다.
영유권을 주장하는 곳이 섬이라서 북방 4도라고 부르기도 하고 북방 영토라고 부르기도 하네요.
섬 이름을 잘 보면 일본명이나 러시아명이나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데
그도 그럴 것이 이 섬의 원주민은 일본인도 러시아인도 아닌 아이누인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누인들이 부르던 이름을 그대로 음차해서 부르니 이름이 비슷한 것이죠.
일본도 러시아도 쿠릴 열도가 있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다른 민족이 살고 있는 땅이라서 자국 영토로 완전히 편입하지 못한 상태였는데
일본은 쿠릴 열도를, 러시아는 사할린을 영토로 하는 조약을 1875년에 맺으면서
두 나라 사이의 영토 문제는 어느 정도 일단락됩니다.
하지만 러일전쟁 후 맺은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일본은 남사할린을 차지했고(일본명 카라후토)
2차 세계대전 말기에는 소련이 일본으로 진주해
남사할린을 수복하는 것에 더해 쿠릴 열도를 자국 영토로 편입하면서
지금의 쿠릴 열도 분쟁이 시작됐습니다.
일본은 2차 세계대전 패전 후 맺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쿠릴 열도 포기가 포함되어 있지만
하보마이 군도와 시코탄섬은 쿠릴 열도가 아닌 치시마 열도라는 별도의 지역이라며 반환을 요구했고
실제로 소련과의 협상에서 두 곳은 반환 논의가 진행되기도 했지만
냉전이라는 시대 상황과 더불어 일본에서 2개 섬이 아닌 북방 4도 전체를 돌려받아야 한다는 여론 변화로 인해
소련은 쿠릴 열도를 일본에 돌려주지 않기로 했고
지금까지도 쿠릴 열도는 러시아 영토로 남아 있습니다.
이런 상황 때문에 일본에서 만든 지도를 보면 홋카이도 옆에 작은 섬들이 그려져 있는 것이죠.
한국 입장에서는 실효 지배라는 측면에서 러시아 영토로 보는 것이 맞아 보이면서도
일본 측 입장을 지지하는 미국의 입장을 완전히 무시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라
공식적인 입장을 밝히지는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외교부 해외안전여행 사이트 등에서 보여주는 지도에서는
은연중에 러시아 땅임을 보여주고 있네요.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인해 쿠릴 열도 분쟁에 변화가 생기나 했지만
아직은 별다른 변화가 없으니
뭔가 다른 일이 생기게 된다면 그때 다시 와봐야지 하고
자료관에서 나와
노삿푸곶 끝으로 이동해
곶 끄트머리에 있는 등대 앞에서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러시아 땅을 바라봅니다.
그러고 보니 깜빡하고 북방관 관람을 안 했네요.
슬슬 시간이 촉박하니
빠르게 북방관 안으로 들어와서
일본의 주장은 가볍게 넘기고
일본이 주장하는 영토와
이투루프 섬 위로 쭉 이어져 캄차카 반도에 이르는 쿠릴 열도의 수많은 섬을 표현한 디오라마를 보고
이 일대 바다 생태계를 묘사한 디오라마도 보고
영토 분쟁으로 실향민이 된 쿠릴 열도 출신 사람들의 인도적 고향 방문에 사용되는
4도 교류선 '에토피리카'호 모형도 보면
북방관 관람은 끝.
슬슬 네무로역에서 출발하는 열차를 타기 위해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해야겠네요.
북방관에서 나와
다음에 또 오게 된다면 여름에 오자고 다짐하며
오로라타워 앞
눈에 파묻혀 갈 수 없는 버스 정류장 앞에서 서있다
노삿푸선 시내버스를 타고
네무로 시내로 돌아갑니다.
ps. 일본 본토 기준으로 최동단은 노삿푸미사키가 맞는데요.
부속 도서를 포함하면 최동단은 일본이 주장하는 쿠릴 열도가 아닌
저 멀리 오세아니아에 있는 미나미토리시마가 일본 최동단입니다.
아쉽게도 여기는 일본 해상자위대 기지가 있어 일반인은 출입 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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