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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 전철 여행기/ㅇㅇ선

P124. 별내역 - 입장료 무료 기간에 찾은 태릉과 강릉

 

 

갈매역을 출발해 별내역에 내렸습니다.

 

 

 

 

별내역이 별내 신도시 내에 있긴 한데 별내 신도시 구경은 나중으로 미루고

 

별내역에서 73번 버스를 탄 뒤

 

 

 

 

삼육대앞 정류장에 내려 강릉으로 갑니다.

 

바로 옆 태릉과 묶어서 태강릉으로 부르기도 하는 조선 명종의 무덤이죠.

 

이름만 보면 태릉입구역이 가까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태릉입구역에서도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야 해서

 

그냥 별내역에서 버스 타고 왔습니다.

 

 

 

 

원래는 입장료로 1,000원을 받는데

 

광복절을 맞아서 무료 개방을 하고 있네요.

 

 

 

 

강릉 관람 구역은 태릉에 비해 좁은 편이니 간단히 무덤만 보고 가겠습니다.

 

 

 

 

홍살문 아래로 난 길 대신 옆으로 빙 돌아서

 

 

 

 

저 위에 있는 무덤을 바라봅니다.

 

왼쪽이 명종, 오른쪽이 인순왕후의 무덤입니다.

 

명종이 살아있을 때에는 어머니 문정왕후 윤씨의 등쌀에 시달린 데다

 

내적으로는 임꺽정이 행패를 부렸고, 외적으로는 을묘왜변이 일어나 이래저래 고생했는데

 

명종이 죽은 뒤에도 이곳 강릉에 이런저런 사고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강릉을 만든 지 3년 만에 무덤 앞 정자각이 불타버리는가 하면

 

다시 지은 정자각 추녀가 부실공사 때문에 떨어져 나가 버리는 사고가 발생했고,

 

이외에도 일반 백성들이 몰래 강릉 주변에 조상의 무덤을 만드는 등

 

죽어서도 편히 지내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하필이면 무덤 자체도 바로 옆 문정왕후의 무덤 태릉이 더 큰 데다 인지도가 높아

 

어찌 보면 죽어서도 문정왕후의 치맛바람에 고통받는다는 느낌도 납니다.

 

 

 

 

강릉에서 태릉으로 가려면 태릉선수촌 위로 난 숲길을 따라 걸어야 하는데요.

 

 

 

 

지금은 숲길 개방 시기가 아니기도 하고,

 

마침 입장료를 받지 않는 기간이니

 

 

 

 

다른 버스로 환승해 태릉까지 이동합니다.

 

 

 

 

태릉은 여인천하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듯이

 

문정왕후 혼자 묻힌 무덤이라기엔 규모가 제법 큰 편입니다.

 

 

 

 

하지만 그 권력을 가지고도 끝내 문정왕후 뜻대로 하지 못한 게 있는데

 

바로 무덤의 위치죠.

 

문정왕후는 남편 중종과 함께 묻히기를 원했지만

 

중종의 무덤 정릉(靖陵)이 있는 강남 일대(선정릉)는 지대가 낮아

 

여름만 되면 침수 피해를 자주 입었습니다.

 

그래서 정릉에 같이 묻히지 못하고 이곳 태릉에 홀로 묻히게 됐죠.

 

 

 

 

무덤 옆 통행로가 막힌 숲길은 나중에 다시 와서 걸어보기로 하고

 

 

 

 

입구 근처에 있는 조선왕릉전시관을 관람합니다.

 

 

 

 

가장 먼저 왕이 죽은 뒤 왕릉을 만들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해줍니다.

 

 

장렬왕후 빈전도감의궤

 

 

왕이 승하하면 조정에서 국장을 준비하는 임시 관청인 빈전도감, 국장도감, 산릉도감을 세우고,

 

왕의 시신은 능으로 옮기기 전까지 빈전에 모십니다.

 

그러는 동안 종묘와 사직에 왕의 승하를 알린 뒤,

 

새로운 왕이 즉위하면서 선왕의 시호를 결정합니다.

 

 

순조인릉 산릉도감의궤

 

 

왕릉은 풍수적으로 명당이어야 하고, 또 한양에 있는 궁궐에서 접근하기 좋아야 하기 때문에

 

여러 조건을 검토해서 땅을 정합니다.

 

 

 

 

왕릉을 지을 땅이 결정되면 봉분을 비롯해 정자각과 비각, 각종 석물 등을 만들고,

 

빈전에 있던 왕의 시신을 능으로 옮기는 발인 의식을 진행합니다.

 

 

정조의 부장품 모형

 

 

왕의 무덤인 만큼 시신을 안치할 때 이런저런 부장품도 같이 묻습니다.

 

왕릉 제례를 담당하는 전주 이씨 가문이 무덤 발굴을 허락하지 않아서

 

조선왕실의궤나 국조오례의같은 문헌을 통해 부장품을 연구한다고 하네요.

 

보통은 왕이 생전에 착용했던 의복,

 

이런저런 생활용품을 축소한 명기 등을 묻었다고 합니다.

 

조선 초기에는 순장 풍습이 이어져서 사람 대신 나무 인형을 묻었다고 하는데

 

영조의 명으로 나무 인형을 묻는 풍습이 사라지게 됐다고 합니다.

 

 

 

 

조선왕릉은 중국과는 조금 다른 무덤 양식을 띄고 있는데

 

중국 황제들의 무덤이 제사를 지내는 침전이 능의 중심이라면

 

조선왕릉의 중심은 시신이 안치되는 봉분이 능의 중심입니다.

 

각종 석물도 중국 황제릉은 신도 좌우에 배치했다면

 

조선왕릉은 봉분 주위에 석물을 배치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나중에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나서야 무덤 양식이 황제릉처럼 변하게 되는데

 

고종과 순종의 무덤인 홍유릉이 다른 왕릉과 조금 다른 모습으로 지어진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태조 건원릉 신도비 탁본

 

 

조선왕릉을 둘러보면 봉분 앞에 정자각이 있고 그 옆에 비각이 있습니다.

 

조선 전기에는 거대한 신도비를 세워서 왕과 왕비의 업적을 자세히 적었는데

 

세조 이후부터는 능역에 신도비를 세우지 않는 제도가 정착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영조 대에 신도비보다 작은 표석을 세워서

 

왕과 왕비의 생몰년과 책봉일을 간단하게 기록했다고 하네요.

 

 

조선왕릉을 구성하는 요소 외에, 이런저런 사연을 지닌 왕릉이 소개됩니다.

 

집안 때문에 중종의 왕비가 되지 못하고 죽었다 200년이 지나 복위된

 

단경왕후 신씨의 무덤 온릉,

 

왕자의 난 때문에 왕비 대접은커녕 무덤조차 훼손됐다 겨우 복원된

 

태조의 두 번째 왕비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 정릉(貞陵),

 

자신이 죽은 뒤 아들이 왕이 돼서 자신도 왕으로 추존된

 

인조 아버지 원종과 인헌왕후의 무덤 장릉

 

별의별 무덤에 얽힌 별의별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봉분 주변을 둘러싼 여러 석물 중 가장 대표적인 문인석과 무인석을 지나면

 

 

 

 

왕릉을 관리하는 능관에 대한 이야기와

 

제례를 담당하는 사찰 '능사'에 대한 소개가 나옵니다.

 

왕실에서 왕과 왕비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만들었다고 해서 원찰(願刹)이라고도 하고

 

왕실 제사 때 쓰일 두부를 만든다고 해서 조포사(造泡寺)라고도 하죠.

 

숭유억불 정책으로 조선 각지에 있는 절들이 500년 동안 별의별 수난을 당했지만

 

왕릉 근처에서 제례를 담당했던 절은 왕실의 뒷배 덕에 화를 면했습니다.

 

특히 융건릉 근처에 있는 용주사는 평지에 지어진데다 홍살문까지 지어져 있습니다.

 

 

 

 

이외에 왕릉에서 역대 왕과 왕비에 대해 지내는 산릉제례,

 

 

 

 

문정왕후와 명종이 승하한 뒤 제작된 어보 등을 보고 전시실을 나왔습니다.

 

 

지금까지 조선왕릉을 여러 곳 돌아봤는데

 

사실 왕릉 그 자체는 대부분 비슷한 모양이라 크게 볼만한건 많지 않습니다.

 

그래도 태릉은 전시실을 잘 갖춰놔서 즐겁게 둘러보고 나왔네요.

 

 

 

 

이번에 못 가본 태릉과 강릉을 잇는 길은 나중에 돈 내고 다시 보러 가기로 하고

 

 

 

 

버스를 타고 태릉입구역으로 갔습니다.

 

 

 

 

ps. 10월에 다시 숲길이 열려서 한글날 태강릉을 다시 찾았습니다.

 

 

 

수도권 전철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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