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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 전철 여행기/ㅇㅇ선

K131. 신원역 - 몽양 여운형 기념관

 

 

국수역에서 국수를 먹고 신원역으로 왔습니다.

 

 

 

 

신원역 앞에는 몽양기념관 이정표가 놓여 있는데

 

 

 

 

몽양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인 여운형의 호입니다.

 

여운형이 태어난 곳이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라서

(당시에는 양근군 서시면 묘곡리)

 

그의 생가가 있던 자리에 기념관을 지은 것이죠.

 

 

 

 

화살표를 따라가

 

 

 

 

언덕을 넘고

 

 

 

 

여운형의 연설이 적힌 돌을 보며 걸어

 

 

 

 

몽양기념관에 도착했습니다.

 

 

 

 

입장료로 1,000원을 내고

 

 

 

 

안으로 들어가 전시물을 관람합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초기부터 참여해 외무부 차장으로 일했고,

 

고려 공산당에 가입해 외국 여러 정치인과 만나 독립을 호소하는가 하면

 

국내로 돌아와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서 이순신 장군 묘소 정돈 사업을 추진하는 등의 다양한 활동을 했습니다.

 

하지만 역사 교과서에 실린 그의 대표적인 업적은 조선건국동맹과 건국준비위원회 활동인데요.

 

 

 

 

일제의 패망이 짙어지자 청년 지하조직을 결성했고,

 

1945년 8월 15일 당일 자신이 만든 지하조직을 기반으로 국가 건국을 준비합니다.

 

조직 결성 당시에는 별다른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는데

 

나중에 각각 조선건국동맹, 건국준비위원회라고 이름이 붙어 저렇게 부르고 있죠.

 

이후 건준위에서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지만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기존에 활동하던 어떠한 정치 단체도 인정하지 않고

 

미군정만을 합법정부로 선언해서 그의 노력이 꺾이고 맙니다.

 

 

 

 

이후 좌우대립이 격화되면서

 

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낸 김규식과 함께 좌우 합작 위원회를 결성해

 

좌우 합작 7원칙을 발표하는 등 민족 화합을 위해 노력했지만

 

좌우 모두 좌우 합작 7원칙을 외면하면서 결국 정계에서 은퇴했고,

 

1947년 근로인민당을 창설하며 다시 정치 활동을 하려 했으나

 

7월 19일 혜화동 로터리에서 암살됐습니다.

 

 

여운형은 평가가 많이 갈리는 독립운동가인데,

 

독립운동가이면서도 일제와 지속적으로 대화를 하며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갔기에

 

살아있을 때는 물론 죽은 뒤에도 끊임없이 친일 의혹에 시달렸고,

 

사회주의자이지만 좌우합작운동으로 우익과 협력하면서

 

좌익은 물론 우익에게도 기회주의자라고 폄하받기도 했습니다.

 

이런 복잡한 상황 때문에 그의 일생에 비해 역사 교과서에 적힌 기록이 상당히 적지 않나 싶습니다.

 

하지만 1947년 8월 3일 치뤄진 그의 장례식이 인민장(지금으로 치면 국민장)으로 치러졌고,

 

해방 이후 최다 인파가 몰렸다는 사실을 보면

 

적어도 민중에게는 엄청난 사랑을 받은 독립운동가였다는 사실은 틀림없겠죠.

 

 

 

 

좌우합작위원회 활동과 여운형의 암살에 대한 안내문 다음 공간은

 

사진촬영금지 구역이라 따로 아쉽지만 사진을 남긴 게 없습니다.

 

 

 

 

이어서 지금은 끝난 기획전시를 보러 갑니다.

 

 

 

 

죽은 이를 슬퍼하여 지은 글이라는 뜻의 만장(輓章/挽章)에 대해 소개하면서

 

 

 

 

여운형의 장례식 때 쓰인 만장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암살이 일어났던 장소를 표시한 약도도 있는데,

 

 

 

 

혜화동 로터리 혜화동우체국 맞은편에 가면 서거지를 나타내는 표석이 놓여 있습니다.

 

 

 

 

다른 만장을 마저 보고

 

 

 

 

계단을 따라 걸어 여운형 생가로 갑니다.

 

 

 

 

이 생가는 함양 여씨가 양평으로 이주한 1715년에 처음 지어졌고,

 

 

 

 

여운형은 1885년 태어나 1908년 부친상을 끝내고 서울로 이주할 때까지 여기서 자랐다고 합니다.

 

 

 

 

하지만 6.25 전쟁 때 건물이 전부 소실됐다 기념관 건립과 함께 생가가 복원됐다고 하네요.

 

 

 

 

방 안에서 면도 중인 여운형 선생을 보고

 

 

 

 

생가를 나왔습니다.

 

 

 

 

언덕길을 내려오면서 여운형이 세웠다는 광동학교 터를 지나

 

 

 

 

다시 연설문을 읽고

 

 

 

묘골은 동네 이름(묘곡리), 애오와(愛吾窩)는 나의 사랑하는 집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여운형의 업적과 외국 여러 인사들이 남긴 여운형의 평가를 적어놓은

 

묘골애오와공원을 거쳐 신원역으로 돌아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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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역에서 국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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