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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 전철 여행기/5~9호선

758. 굴포천역 - 부평역사박물관

 

 

비가 내린 2019년 9월의 어느날, 굴포천역에 왔습니다.

 

 

 

 

굴포천역에서 조금 걸으면 삼산체육관이 나오는데

 

9월은 프로농구 경기가 없으니 여기에 볼일은 없네요.

 

 

 

 

그러니 방향을 북쪽으로 틀어

 

 

 

 

부평역사박물관에 도착했습니다.

 

인천 지역사에 대해 다루는 인천광역시립박물관과는 별개로 부평구 지역사만을 다루는 박물관인데

 

인천과는 별개 행정구역으로 지낸 역사가 더 길어서 이렇게 따로 박물관을 만든걸까요?

 

 

 

 

아무튼 부평역사실부터 들어가봅니다.

 

 

부평군읍지

 

 

전시실로 들어가니 부평구 일대를 그린 고지도와 함께 부평에 대한 행정구역 변천사에 대해 다룹니다.

 

역사적으로 부평이라는 지명이 처음 등장한 것은 고려 충선왕 때인 1310년으로

 

이때는 부평부라는 행정구역이었습니다.

 

이후 조선시대에는 부평도호부, 경기도 부평군이었고,

 

일제강점기인 1914년 부천군 부내면으로 흡수됐다

 

1940년 부내면이 인천부에 편입되면서 지금까지 인천의 일부로 남아 있습니다.

 

 

 

 

이어서 정조가 수원에 행차하던 중 부평에 들를 때의 어가행렬을 재현한 인형이 나오고,

 

 

 

 

근대에 인천이 개항장으로 지정되면서 갑자기 바뀌어버린 사람들의 생활사에 대해 보여줍니다.

 

 

 

 

부평 지역사에 있어서 주목할만한 시대는 아무래도 일제강점기일텐데

 

 

일제강점기 노동자 주택인 미쓰비시 줄사택을 재현한 모형

 

 

중일전쟁 이후 일제가 한반도를 병참기지화하면서

 

인천항과 경인선으로 연결되는 부평 일대에 육군 조병창을 비롯해서 각종 군수공장을 지었고

 

 

조병창과 관련된 여러 사료들

 

 

이들 공장에서 일할 노동자들이 지낼 공동주택이 대규모로 지어지면서

 

그전까지는 농촌 평야였던 부평의 모습이 크게 바뀌게 되었습니다.

 

 

 

 

해방을 맞이하면서 부평에 일제의 공장은 사라졌지만

 

1962년 청천동에 새나라자동차가 자동차공장을 지으면서 부평 일대의 경제를 책임졌고

 

 

GMK 시절 부평에서 생산한 시보레 1700.

 

 

새나라자동차는 신진자동차, GM 코리아(GMK), 새한자동차, 대우자동차, 그리고 다시 GM으로

 

여러 번 이름을 바꾸었지만 지금까지 부평에 남아 있습니다.

 

 

 

 

한편 일제의 조병창이 남아있던 자리에는 미군 군수지원부대, 줄여서 애스컴(ASCOM)가 들어섰다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최근에 이르러서야 부지가 완전히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는데

 

이 이야기는 이 글 아래에.

 

 

 

 

이외에 추억의 교정이라는 이름으로 옛 학교 모습을 다룬 전시물이 있고,

 

 

 

 

부평의 유명 인물에 대해 다룬다면서

 

고려 중기 무신정권 때 활약한 문신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이나,

 

 

부평이씨세보

 

 

부평을 본관으로 하는 가문의 족보 등을 전시하고 있네요.

 

 

 

 

이어서 다음 전시실인 농경문화실로 들어갑니다.

 

 

논밭에 거름을 뿌리고 씨앗을 심는 봄.

 

 

지금은 부평에 논밭이 없다고 해도 무방하지만

 

 

서로 품앗이를 하며 못자리에서 자라던 벼를 논으로 옮겨심는 여름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당연히 부평에서도 농사를 지었습니다.

 

애초에 지명 자체가 비옥한 평야(富平)라는 뜻이기도 하고요.

 

 

다 자란 벼를 베고 추석을 지내는 가을.

 

 

다만 지명과는 달리 실제로는 수해가 잦아 오랫동안 농사를 짓는데 어려움을 겪다

 

농법이 발달하고 관개수로를 정비하면서 제대로 된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고 하네요.

 

 

설을 맞으며 새로운 농사를 준비하는 겨울.

 

 

아무튼 부평이라는 지명이 농사와 어느 정도 얽혀있어서 그런지

 

농촌문화실이라는 전시 공간을 따로 만들어놓고

 

계절 변화에 따른 농촌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농촌에서 쓰던 각종 도구를 지나면

 

 

 

 

관혼상제라고 묶어 부르는 전통사회의 예법에 대해 다루는 공간이 나오고,

 

 

 

 

과거의 의식주 생활을 보여주는 물건들도 나옵니다.

 

 

 

 

인천시무형문화재 제36호 부평두레놀이 역시 농촌사회의 공동체 의식을 보여주는 요소기에

 

이곳에서 다루고 있네요.

 

 

 

 

마지막으로 기획전시실에서 열린 전시

 

'헬로우 - 애스컴시티 - 굿바이 캠프마켓'을 보러 갑니다.

 

 

 

 

광복 후 일본 육군 조병창 부지를 차지했던 주한미군 부대에 대해 다루면서

 

이 미군부대가 부평 일대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돌아보는 전시입니다.

 

 

 

 

광복 후 미군이 한반도에 들어서면서 군정 통치를 하는 동안

 

미군은 일제 육군이 사용하던 부평 조병창 부지를 접수해

 

군수지원부대(Army Support Command Korea), 줄여서 애스컴을 주둔시켰습니다.

 

 

 

 

6.25 전쟁 중에는 포로수용소를 이곳에 지어놓기도 했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미국이 애스컴을 통해 식량, 의료품 등의 물자를 외부에 지원하면서

 

부평 일대 복구에 힘을 썼습니다.

 

 

 

 

평소에는 굳게 문을 닫고 있지만

 

대민활동을 위해 부대를 개방하는 날이면 부평 사람들이 부대 내에서 각종 신문물을 만나기도 했고,

 

 

부대 내에서 또는 부대 점령지 일대에서 사용하는 일종의 대체화폐인 군표.

 

 

미군 장병들이 부대 밖으로 외출해 부평 일대 상권을 이용하면서

 

부평 일대 문화에 미군이 영향을 미쳤습니다.

 

 

 

 

미군부대는 부평 주민들의 경제적 터전이 되기도 했는데

 

청소부는 물론 이발사, 벽돌공, 운전사 등 각종 부대지원업무를 지역주민을 고용해서 해결하기도 했고,

 

 

 

 

미군 PX에서 유통되는 미제 물품을 빼돌려서 암시장인 이른바 양키시장에 되팔아 돈을 벌기도 했습니다.

 

 

 

 

물론 밝은 면만 있는 것은 아니어서

 

기지촌 일대에 양공주들이 매춘으로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외화벌이 유공자로 미화되는가 하면

 

반대로 성매매 여성으로 폄하받기도 했죠.

 

이들이 낳은 혼혈 아이들은 또다른 사회적인 문제를 낳기도 했습니다.

 

 

 

 

한편 미군은 부대 주변 클럽에 미국의 대중문화를 전파했고

 

이 클럽에서 한국 음악가들이 새로운 영감을 얻기도 했습니다.

 

 

 

 

소설가들도 부평 기지촌의 모습을 보고 여러 작품을 남기기도 했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부평 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친 애스컴시티.

 

미국은 월남전에 병력을 증파하면서 1973년에 애스컴시티를 해체했고

 

미군 부대에 빵을 공급하는 캠프 마켓만을 남겨뒀습니다.

 

시간이 흘러서 1990년대 캠프 마켓도 부지를 반환받아야한다는 시민운동이 펼쳐졌고

 

2002년 3월 부평미군기지 반환이 결졍됐습니다.

 

하지만 여러 이유로 이전이 미뤄지다

 

2020년 1월 드디어 캠프 마켓 부지가 한국에 반환됐죠.

 

 

 

 

이 전시를 보기 전에 애스컴이 있던 부영공원을 다녀았기에

 

남의 동네 이야기이지만 상당히 재미있게 전시를 관람했습니다.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밖으로 나와

 

문이 굳게 닫힌 부평두레놀이보존회 건물을 지나

 

 

 

 

비때문에 흐려진 물이 흐르는 굴포천을 걸으며 지하철을 타러 갔습니다.

 

 

 

수도권 전철 여행기

757. 삼산체육관역
한국만화박물관 일본소녀만화전
758. 굴포천역 759. 부평구청역
북극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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