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들른 모리오카 버스 센터.
모리오카 시내를 휘젓고 나가는 온갖 버스들이 출발하는 곳인데
이날 탈 버스는 6시 45분에 모리오카 버스 센터를 출발하는 마츠카와온천행 시내버스입니다.
마츠카와온천은 이와테산 기슭에 숨은 듯이 자리 잡은 작은 온천인데
온천이 목적은 아니지만 이건 조금 뒤에 다뤄보도록 하죠.
버스 출발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
잠시 관광 안내 팸플릿을 둘러보고
4번 승강장으로 나가니
버스가 오긴 왔는데 시내버스 치고는 급이 높아보이죠?
일본에서는 시내버스와 고속버스의 구분이 모호해서
버스회사에서 노선버스(路線バス)라고 구분해 놨으면 그게 시내버스입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행선지를 다시 확인하고 버스에 승차한 뒤
이름대로 붉은 벽돌로 지은 이와테은행 아카렌가관을 지나
모리오카역을 거쳐
시외로 떠납니다.
모리오카시를 떠나면 버스 왼쪽에 거대한 산 하나가 계속 보이는데요.
위에서 잠깐 언급한 이와테산입니다.
해발 2,038m 높이의 화산인데 지금도 화산활동이 일어나고 있는 화산이라
온천이 자리 잡은 것 같습니다.
이와테현을 비롯해서 윗동네인 아오모리현 도로 행선지를 보면
끝이 헤(戸)로 끝나는 지명이 참 많습니다.
니노헤시(二戸市)나 하치노헤시(八戸市)처럼 유명한 도시는 물론
이치노헤마치(一戸町)부터 시작해서 쿠노헤무라(九戸村)까지
4를 빼고 1부터 9까지 전부 다 지명으로 있는데
대략 8세기말부터 12세기말까지 이어진 일본 헤이안 시대 때
이 일대에 있던 말을 기르는 목장을 구분하던 번호가 지명으로 남아 지금까지 이어져서 그렇다고 합니다.
과거에는 4목장도 있었겠지만 아무래도 4는 부정적인 의미가 강하니 사라졌다고 하네요.
계속 도로를 달리니 출근 시간은 출근 시간인지 길이 막히기도 하고
러시아와 가까운 곳에 있어서 그런지 육상자위대 차량이 여럿 보이기도 합니다.
오부케역을 지나고 나니
어느새 버스에는 승객이 저 혼자뿐입니다.
가도 가도 시야에 계속 보이는 이와테산을 다시 한번 찍으면서
눈으로 덮인 길을 달리는데
눈이 쌓인 곳에 막대가 나란히 박혀 있습니다.
눈이 많이 내리면 어디가 인도이고 어디가 차도인지 구분이 가지 않으니 저 막대를 보고 다니는 것 같습니다.
길가에 민가가 안 보일 즈음
버스는 하치만타이 마운틴 호텔에 도착했는데요.
버스 밖을 보니
호텔 앞에 한눈에 봐도 엄청 오래된 버스가 대기 중입니다.
미국 스쿨버스같이 생긴 이 프런트엔진 버스를
일본에서는 보닛 버스, 일본식 발음으로는 본넷트 버스(ボンネットバス)라고 부르는데요.
모리오카에서 마츠카와온천을 잇는 이와테켄포쿠버스 마츠카와온천선은
동계 시즌에는 하치만타이마운틴호텔 정류장에서 종점 마츠카와온천 정류장까지
보닛 버스가 운행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진작에 사라졌고 박물관에서도 보기 힘든 버스가
2020년대에도 현역으로 운행하고 있으니,
게다가 눈으로 덮인 산길을 달린다니 이건 타봐야겠다고 마음먹고
2022년부터 계획을 짜 여기까지 왔습니다.
버스를 갈아타야 하는데 일본에는 교통카드 무료 환승 같은 제도는 없으니
지금 탄 버스에서 요금을 내야 하는데요.
버스 기사가 단말기를 열심히 조작해서 지금 도착한 정류장을 마츠카와온천으로 바꿔 교통카드를 찍습니다.
총 요금은 1,210엔.
버스에서 내리고 옆에 있는 보닛 버스에 타면서
교통카드는 찍지 않고 자리에 앉아 버스 내부를 둘러봅니다.
이스즈자동차에서 트럭 섀시를 기반으로 만든 1968년식 TSD40改 4륜구동 버스인데
연식이 연식인 만큼 버스 곳곳에 세월의 흔적이 드러나면서도
2022년에 이와테켄포쿠버스에서 도입한 교통카드시스템이 이 버스에도 설치됐다는 사실에 신기함을 느끼고
그 와중에 버스 자동안내방송은 설치되지 못해
버스 기사가 정류장을 지날 때마다 버튼을 눌러 안내방송을 수동으로 트는 모습에 황당함을 느낍니다.
버스 회사에서 겨울에 이 구간에만 보닛 버스를 투입하는 이유로
눈길의 급경사를 통상적인 버스로 운행하는 것이 어려워서라고 설명하고 있는데요.
버스가 다니는 길을 직접 보니
확실히 후륜구동인 데다 엔진이 뒷바퀴보다도 뒤에 있는 버스로는 길을 올라가기도 힘들 것 같네요.
눈 덮인 산을 덜덜거리면서 천천히 올라가는 버스는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그보다도 기둥조차 눈에 파묻혀 보이지 않는 정류장을 지나
20여 분을 달려
종점 마츠카와온천에 도착했습니다.
승객을 내린 버스는 여기서 기다리지 않고
버스 대기실이 있는 다른 곳으로 떠나네요.
눈에 파묻힌 버스 정류장으로 가서
버스 시간표를 다시 확인해 봅니다.
지금 시간이 9시니 앞으로 45분을 더 기다려야 하는데요.
아무것도 없는 밖에서 추위를 견디면서 기다리기는 뭣하니
바로 옆에 있는 마츠카와온천 쿄운소(松川温泉 峡雲荘)로 들어가
잠시 머무르고 가겠습니다.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머물다 가는 건 민폐니
직원분께 안에 음료를 파는 공간이 있는지 물어봤는데
다행히 매점에 음료를 팔고 있네요.
손님 대기실에서 앉아 버스를 기다려도 된다는 허락을 받고
매점에서 산 커피를 마시면서 언 몸을 녹이다
다시 마츠카와온천으로 돌아온 버스에 올라탑니다.
마츠카와온천으로 갈 때에는 저 말고도 승객이 1명 더 있었는데
이 시간에 마츠카와온천을 떠나는 사람은 저 혼자네요.
한눈에 봐도 오래돼 보이는 계기판 옆 내비게이션 모니터가 달린 이질적인 모습에 감탄하면서
제가 좋아하는 노래의 가사를 떠올려봅니다.
제인팝이라는 그룹이 부른 Drive to 1980 Love라는 노래에는
'나는 겪어보지 못한 향수를 가진 21세기의 주변인'이라는 가사가 있는데요.
이 가사처럼 태어나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존재에 대한 향수를 느껴봅니다.
버스 기사 옆 자리에 앉아
버스가 달리는 동안
버스가 달리는 눈길을 열심히 사진으로 남기고
환승 정류장인 하치만타이 마운틴 호텔에 도착.
모리오카로 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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