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은 일본 최초의 철도 노선 토카이도 본선이 개통한 지 150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래서 철도 개업 150주년을 기념하는 여러 이벤트가 열렸고
관련 굿즈도 이것저것 만들어 팔고 있는데요.
그중 안 좋은 의미로 존재감을 뿜어대는 굿즈가 있으니 바로 한정판 스이카입니다.
15,000매 수량 한정, 판매 기간 한정, 심지어 카드 유효기간까지 한정으로 지정해 버린 카드 세트인데
아무리 액자를 같이 준다고 하더라도
충전금이 단 한푼도 들어가지 않은 주제에 15,000엔이나 하는 이 카드를 살 사람은 많지 않아서
한정판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악성 재고가 돼버렸는데요.
작년 8월에 본 홍보물이 아직도 도쿄 곳곳에 붙어 있는 모습을 보니 짠해지기까지 합니다.
그러니 호구가 되기로 하죠.
처음 카드를 판매할 때에는 온라인 주문으로만 살 수 있었는데
하도 안 팔려서 오프라인 판매도 병행하고 있으니 배송비 아끼는 셈 치고 사기로 했습니다.
도쿄역 NewDays으로 가서 150주년 기념 스이카를 달라고 하니
이거 15,000엔짜리인데 정말 살 거냐고 점원이 되물었거든요.
점원마저 구매를 다시 한번 묻는 카드를 정말 사야 하나 고민했지만 카드를 긁었습니다.
카드 수집하면서 이것보다 더 비싼 돈도 지불해 봤으니...
아무튼 포장을 뜯어보면
생긴 것만큼은 고급지지만
카드에 유효기간을 2023년 3월 31일로 박아버린 결정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괜히 무거운 짐을 늘린 채로 호쿠리쿠 신칸센 아사마에 올라타
계란말이만 보면 정신을 잃어서 사버린 에키벤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경치를 바라보며 이동하죠.
멀리 보이는 곳에 눈이 쌓인 산을 볼 때마다 날씨가 또 개판이 될까 봐 이젠 무서워지는데
다행히 날씨 자체는 돌아다니기에 문제가 없는 수준입니다.
중간에 멋진 모습을 한 산이 있어 사진을 찍어봤는데
등산을 좋아하는 친구에게 보여주니 여기가 아사마산(浅間山)이라고 하네요.
일본에 있는 활화산 중 가장 높은 고도 2,568m 산이고
지금 타고 있는 신칸센 열차 이름 아사마의 유래가 된 산이기도 합니다.
아사마산을 터널로 통과해 도착한 곳은 우에다.
화산인 아사마산을 끼고 있는 동네라서 벳쇼 온천을 비롯해 여러 온천이 있는 것으로 유명한 도시입니다.
그 외에 애니메이션 늑대아이로 유명한 감독 호소다 마모루의 작품 썸머 워즈의 배경이 이곳이네요.
저는 온천에 관심이 없고 로케이션 성지순례에도 관심이 없으니
다른 목적으로 우에다시를 찾았는데
우에다성터 건너편에 있는 우에다시 관광회관으로 들어가
아직도 놓여있는 썸머 워즈 관련 패널을 지나 관광안내소 직원을 찾아갑니다.
일본에서 공유자전거 사업을 하는 NTT 도코모에서
우에다시와 치쿠마시 일대에서 공유자전거 실증실험을 하면서
요코하마 베이바이크처럼 1일권 전용 카드를 도입했길래
이걸 구하러 신칸센을 타고 우에다에 왔습니다.
문제는 실증실험 기간이 끝나고 아직 본 서비스 시작을 안 해서
1일권 판매는커녕 공유자전거도 없네요.
우에다 왜 온 거지…
아무것도 안 하고 떠날 수는 없으니 아쉬운 대로 길건너에 있는 우에다성터공원으로 갑니다.
이름대로 여기에는 우에다성이 있었는데
메이지 유신 때 폐번치현, 폐성령 등의 명령이 내려지면서 성이 사라지게 됐습니다.
그래서 성곽은 비교적 보존이 잘 된 편인데 내부는 텅텅 비어있네요.
그래도 벚꽃이 피는 시기에 오면 예쁘다고 하는데
벚꽃 명소가 일본에 한둘이 아니니
벚꽃 보겠다고 굳이 여기까지 올 사람이 있을지…
아무튼 성터 구경을 짧게 하고 우에다역으로 돌아가기 전에
근처에 있는 대형마트에 들러
뜬금없이 만난 네네치킨을 지나
스타벅스에서 나가노현 한정 지역카드를 구입합니다.
산이 많은 동네답게 등산을 하는 사람이 그려져 있고
그 옆에는 나가노의 명물 온천욕하는 원숭이도 있네요.
원래의 목적은 실패했지만 그래도 우에다에 와서 뭐라도 하나 건지고 갑니다.
우에다역으로 돌아와서 역명판 옆을 보니 우에다역에 있는 세 철도회사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위에서부터 JR동일본, 시나노 철도, 우에다 전철 벳쇼선인데
우에다역에는 JR 동일본에서 운영하는 노선은 호쿠리쿠 신칸센 하나뿐이고
나머지 재래선은 다른 회사에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원래는 JR 동일본에서 군마현 타카사키에서 나가노를 거쳐 니가타로 가는 신에츠 본선이라는 노선을 운행했는데
이 노선과 비슷하게 따라가는 신칸센 노선을 짓게 되자
장거리 이동 수요가 신칸센으로 몰릴 것이 뻔해 수익이 떨어질 테니
JR 동일본은 신에츠 본선 중 신칸센과 겹치는 부분 운영을 포기합니다.
신에츠 본선처럼 신칸센과 나란히 달린다고 해서 병행 재래선으로 지정된 노선은
대부분 신칸센 노선이 개통하게 되면 JR로부터 버려지게 되는데
지역 주민들의 단거리 이동 편의를 포기할 수 없는 지자체들은
하는 수 없이 JR로부터 노선을 양도받은 뒤
지자체 예산과 지역 기업 자본을 출자해 만든 철도 회사가 양도받은 노선을 운행하게 합니다.
나가노현에서는 이 역할을 시나노 철도라는 회사가 맡게 됐고
시나노 철도처럼 지자체와 민간자본이 섞인 지분구조를 가진 회사를 제3섹터라고 구분하고 있습니다.
행정학을 배우신 분들이라면 들어봤을 명칭일텐데
원래는 국영(제1섹터)도 민영(제2섹터)도 아닌 비영리부문을 가리키던 말이었지만
일본에서 의미가 변형돼서 사실상 일본식 조어처럼 쓰이고 있습니다.
하코다테에서 아오모리로 가는 배를 탈 때 이용한 도난 이사리비 철도도
시나노 철도와 같은 이유로 만들어진 회사인데요.
일본에서는 신칸센 노선이 새로 지어질 때마다
병행 재래선이 JR로부터 떨어져 나가 제3섹터 회사가 새로 출범하고 있습니다.
민영화된 JR에게 손실을 강제할 수 없는 일이지만
JR이 수익을 낼 수 없어 버린 노선을 지자체라고 해서 살릴 수 있을 리가 없으니
적자가 늘어나게 되고 이 적자를 메우겠다고 운임은 오르고
비싼 운임 때문에 주민들이 철도 이용을 줄이고 적자가 늘어나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적자가 심하니 지자체나 JR이 도와주지 않는 이상 교통카드 도입 등 설비 개선은 언감생심이고요.
일본 국철 민영화에 대한 명과 암이 뚜렷한데 그 암을 짧게 체감해 봅니다.
스타벅스 카드를 샀지만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주문하기엔 시간이 빠듯해서
대신 우에다역 근처에 있는 탈리스 커피에서 커피를 사고
우에다역 신칸센 승강장으로 올라와
저녁을 먹으러 도쿄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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