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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 전철 여행기/5~9호선

935. 한성백제역 - 한성백제박물관



송파나루역에 이어 한성백제역에 왔습니다.


조금만 더 가면 8호선 몽촌토성역이 있지만 환승통로를 만들기에는 멀고


8호선과의 환승은 석촌역이 있으니 몽촌토성역과 별개로 역을 만들었나 봅니다.





4번 출구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니





한성백제역이라는 역명에 영향을 준 한성백제박물관이 나옵니다.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의 서울 역사에 대해 다루는 박물관이네요.





동굴과 막집에서 주거하던 구석기 시대를 지나





강가에서 농사를 하며 움집에서 사는 신석기 시대를 보여줍니다.





서울 암사동 유적지에서 신석기 시대 유물이 발굴돼서


신석기를 대표하는 빗살무늬 토기를 같이 보여주고 있네요.





이어서 청동기 시대를 보여주는 디오라마가 나오는데


거주지에 울타리를 쳐서 다른 부족과의 전쟁에 대비한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 옆에는 나무 앞에서 종교 의식을 치르는 가운데


부족장의 무덤인 고인돌을 짓는 모습이 보이네요.





청동으로 만든 각종 무기도 보여주고 있는데


녹슨 청동기 유물이 본래 어떤 모습이었는지도 같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철기 시대에 이르러선 한반도에 여러 나라가 등장합니다.





삼한으로 묶어 부르는 나라 중


마한의 일부인 백제국이 주변 소국을 정복하면서 우리가 아는 그 백제로 성장합니다.





백제 건국신화에 따르면 졸본부여, 즉 고구려의 왕 주몽의 왕자였던 비류와 온조가


주몽의 또 다른 아들 유리에게 밀려 왕위를 물려받지 못하게 되자


어머니 소서노를 모시고 남쪽으로 내려와 나라를 세웠다고 합니다.






형인 비류는 배를 타고 미추홀(인천)에 나라를 세우고


동생 온조는 하남위례성에 십제라는 나라를 세웠습니다.





십제(十濟)라는 국명은 온조를 따른 신하가 10명이라는 뜻에서 지었는데


이후 미추홀을 흡수하면서 국명을 백제로 고쳤다고 합니다.





백제의 첫 수도인 위례성은


규모가 커지면서 한성으로 이름이 바뀝니다.





한성에는 궁궐이 있는 북성 풍납토성과





별궁이 있는 남성 몽촌토성 2개 성이 있죠.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에는 상당히 많은 백제 유물이 발굴됐는데





유물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는 것이고


예나 지금이나 인구가 곧 국력이니


이것은 백제가 상당히 이른 시기에 강대국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요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어서 백제 사람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전시로 넘어갑니다.





가장 먼저 보이는건 건축 모형입니다.


풍납토성 발굴 과정에서 나온 건물터를 바탕으로 추측한 모습인데


건물터의 규모나 구조,


그리고 온조가 나라를 세우고 가장 먼저 시조 동명왕을 모시는 사당을 만들었다는 기록때문에


동명사당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 옆에는 백제 의복 문화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고구려 유이민이 세운 나라라 백제 옷이 고구려와 비슷하다는 기록이 있고


백제 사신을 묘사한 그림이 중국에 남아있어 이를 바탕으로 백제 옷을 만들어놨습니다.





중국과 교류가 활발해 오래전부터 한자를 사용했고





놀이 역시 중국에서 건너온 바둑 등을 즐겼죠.





이어서 고분문화에 대한 전시물이 나옵니다.


간단하게 시체를 담은 널을 묻은 널무덤이나 흙무지무덤도 있지만





석촌동 고분군에 있는 계단식 돌무지 무덤도 있죠.


특히 계단식 돌무지 무덤은 백제와 고구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요소라


백제 건국 세력이 고구려에서 남하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반면 신라는 돌덧널무덤이라는 고구려, 백제와는 다른 고유한 고분 문화를 가지고 있었는데





삼국간 교류가 이어지면서 삼국시대 후기에는 공통적으로 굴식 돌방무덤이 나타납니다.





이어서 백제의 대외교류에 대한 전시가 이어집니다.





백제는 삼국 중 가장 많이 일본과 교류한 나라입니다.


한문, 불교 등 여러 문물들이 중국에서 백제를 거쳐 왜로 건너갔고


백제가 신라에 멸망한 뒤 왜가 백제 부흥운동을 돕기도 했습니다.


이런 교류는 삼국사기뿐만 아니라 일본 역사서 일본서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백제의 영향을 받은 문화재로


교토 코류지(広隆寺)에 있는 목조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 불상이 백제의 영향을 받았다는 설명은 처음 봅니다.


이 불상은 당시 신라 영토였던 경북 봉화군 일대에 많은 적송으로 만든데다


일본서기에 신라에서 불상을 받았다는 기록도 있거든요.


아무튼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상당히 유사해


삼국시대 문화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백제 역시 중국과의 교류를 중요시했습니다.





그래서 중국 남북조시대 남조 양나라를 찾은 사신들을 그린 양직공도에 백제 사신이 담겨 있죠.


중국 난징박물관에 있는 이 그림은 백제 의상 문화를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백제 사신 옆에 백제의 풍습을 기록해놔서 가치가 높습니다.





양직공도 외에도 남당 고덕겸 모양원제번객입조도, 당염립본왕회도에 백제 사신을 볼 수 있는데


이 두 그림은 양직공도를 모방해서 그린 그림이라네요.





양나라에 온 사신이 백제 사신만 있는 것은 아니니


다른 국가 사신들이 입은 옷을 비교하면서 볼 수 있습니다.





4세기 말 황해도를 차지하면서 한반도에서 세력을 넓혔던 백제는


5세기 고구려의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이 남하하면서 쪼그라듭니다.


이때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면서 전성기를 열었죠.





고구려가 한강을 차지했을 때 지은 유적이 아차산에 남아있고


관련 유물을 여기서 전시하고 있습니다.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개로왕이 사망하면서


아들 문주왕은 수도를 웅진(공주)로 옮겼고





성왕 때는 다시 사비(부여)로 천도하면서 부흥을 꿈꿨지만 신라의 방해로 좌절됩니다.





백제 비유왕 때 신라 눌지 마립간과 동맹을 맺었고


백제 동성왕 때 소지 마립간과 혼인동맹을 맺었지만


두 나라가 힘을 합쳐 고구려를 한강 유역에서 몰아내는 과정에서


신라가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을 죽이면서 한강 유역을 완전히 차지했죠.





한강을 차지한 신라는 결국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리면서 삼국을 통일하고


후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에 흡수될 때까지 한성을 지배합니다.


박물관 해설은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때까지 다루고 있네요.





전시실을 나오니 풍남토성 단면도와 건설 현장을 재현한 모형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풍납토성 발굴조사에서 나온 토기를 보여주면서





풍납토성이 어떻게 지어졌는지, 어떻게 방어했는지에 대한 연구 내용을 알려줍니다.





기획전시실에는 산둥박물관과의 교류 차원에서 열린


'한중 교류의 관문, 산둥'이라는 특별전이 열렸습니다.





실크로드의 끝을 중국에서 한반도로 확대해


한반도와 중국 사이의 상호 교류를 보여주고자 한다는게 기획 의도입니다.





신석기 시대 유물부터 시작해서





화폐로 쓰인 것으로 보이는 금화 등을 통해


오래전부터 양 지역 간 교류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풍납토성에서 발굴된 유악 바른 도기를 통해


삼국시대 문화 교류를 보여줍니다.





당삼채를 비롯한 당대 자기뿐만 아니라





불상과 같은 불교미술을 통해





불교 수용 과정에서의 교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백제는 중국에서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이것을 재해석해 일본에 전달했습니다.


백제의 중간자적인 역할에 대해 보다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으로 전시가 끝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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