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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 전철 여행기/ㅇㅇ선

K419. 세종대왕릉역 - 두 왕의 무덤, 영릉과 영릉



전철을 타고 세종대왕릉역에 내리자마자





904번 시내버스에 탔습니다.





904번 버스는 경강선 역에서 세종의 무덤인 영릉(英陵)과 효종의 무덤인 영릉(寧陵), 합쳐서 영녕릉을 잇는 버스입니다.


세종대왕릉역과 영녕릉이 같은 능서면에 있긴 하지만 거리로 따지면 세종대왕릉역보다는 여주역이 가까운데


904번 버스가 개통되면서 세종대왕릉역에서 왕릉 관광하기 편해졌죠.


2019년 12월 현재는 아쉽게도 버스 노선이 폐선돼서


영녕릉으로 가려면 세종대왕릉역이 아닌 여주역에서 950번대 시내버스를 타거나 시티투어버스를 타야 합니다.





세종대왕역에서 10분간 달려 효종 영릉에 도착했습니다.





원래는 두 무덤을 관람하는데 입장료 500원을 받았는데


세종 영릉 일대 복원공사를 시작하면서 남은 구역은 무료로 관람할 수 있게 개방했습니다.





효종 영릉은 전체를 관람할 수 있으니 효종 영릉부터 관람을 시작합니다.





조선왕릉 재실 중 원형 보존이 가장 잘 돼있어 따로 보물 제1532호로 지정된 재실을 지나





효종 영릉에 도착했습니다.





효종 영릉은 원래 구리시 동구릉에 있었는데 1673년(현종 14년) 이곳으로 옮겼습니다.


왕릉 석물에 금이 가거나 깨지는 일이 계속 일어나서 무덤을 옮겼다네요.


능침을 바라보니 효종의 릉(왼쪽)과 인선왕후의 릉(오른쪽)이 놓여 있습니다.





문이 열린 비각 안으로 들어가 비석을 보니





비석 앞에는 '조선국 효종대왕 영릉'이라는 글씨를 전서체로,





뒷면에는 효종 무덤을 이곳에 이장했다는 사실과 인선왕후 무덤을 그 앞에 둔 사실을 해서체로 기록했습니다.





효종 영릉 관람은 이정도로 하고 세종 영릉으로 이동하기 위해 왕의숲길을 걷습니다.





이 길을 따라 숙종, 영조, 정조가 행차한 기록이 있어 왕의숲길이라 이름붙였나 보네요.





처음에는 가볍게 걸었는데





경사진 길이 계속 이어져서 생각보다 걷기 힘듭니다.





걸은지 10분 후에 왕의숲길 반대편에 도착했습니다.





정자각 일대는 복원 공사가 한창입니다.





세종 영릉 비각도 문이 열려 있는데





뒷면을 보니 비석 윗부분이 흐릿합니다.


세종 영릉비가 효종 영릉비보다 나중에 만들어졌는데 어째 훼손 정도는 세종 영릉비가 더 심해 보이네요.





비각을 나와 능침 옆으로 난 계단을 걸어 능침으로 올라갑니다.





효종 영릉과 마찬가지로 세종 영릉 역시 위치를 옮긴 왕릉입니다.


원래는 태종 무덤인 헌릉 근처에 있었는데 예종 때 이곳으로 이장했죠.


이와 관련해서 풍수지리와 관련된 이야기가 있는데, 여기에 쓰기엔 조금 기니 나무위키 링크를 걸겠습니다.





능침에서 복원공사가 진행 중인 모습을 바라본 뒤





다시 왕의숲길을 따라 효종 영릉으로 이동합니다.





영녕릉에는 세종과 효종의 업적을 정리해 보여주는 세종대왕역사문화관이 있는데요.


이미 왕의숲길 왕복 1,400m를 걸었는데 왕복 2,000m를 또 걸어가야하니 여길 갈지말지 고민을 했지만


멀리서 왔으니 가보자 하고 발걸음을 뗍니다.





전시관으로 가는 길에 여러 사진이 걸려 있는데 공사 전 세종 영릉 전경이 담긴 사진도 있네요.





왕의숲길처럼 언덕이 이어지는 길을 걷다





중간에 약수터를 만나 목을 축이고





공사장 옆으로 난 길을 지나





문을 닫은 세종 영릉 매표소를 거쳐





세종대왕유적관리소를 돌아





세종대왕역사문화관에 도착했습니다.





전시실로 들어가니 세종대왕에 대한 설명부터 시작됩니다.





운보 김기창이 그린 표준영정 옆에





세종대왕의 주요 업적을 요약한 글이 적혀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업적이야 당연히 훈민정음 창제지만 그외에도 수많은 업적을 남겼는데요.





왕자 시절 형제들과 달리 학업에 열중이었다는 이야기를 담은 그림을 시작으로





상왕 태종의 명령에 따라 이종무를 시켜 대마도를 정벌하고,





박연 등에게 국산 편경 제작을 맏기고,





혼천의와 같은 천문기구 제작을 명하고,





태종 때 만든 금속활자 계미자의 단점을 보완해서 경자자, 갑인자 등의 금속활자를 새로 만들고,





측우기라는 기상 측정 도구를 만들고,





이름만 남아있던 집현전을 개편해 학문 연구와 국정 자문 등의 기능을 부여하고,





여진과의 접경 지대라 이런저런 충돌이 잦던 북방 지역을 개척해 4군 6진을 설치하고


백성을 이주시키는 등의 다양한 업적을 그림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여러 책 중 세종대에 출간된 책이 많아 복제본 여러 개를 놓고 전시 중인데요.





훈민정음을 비롯해 농부로부터 직접 이야기를 들어 저술한 농사직설,


선왕들의 업적을 찬양한 용비어천가 등 여러 책이 놓여 있습니다.





국악 악기인 특경과 편경도 전시 중인데


편경에 쓰이는 옥돌을 중국에서 수입하다


세종이 박연에게 조선에서 난 옥으로 편경을 만들 것을 명해 국산화에 성공했죠.


이 과정에서 세종이 편경을 시험할 때 옥에서 난 소리를 듣고 음정이 잘못됐고 지적했다는 기록이 있어


세종대왕이 절대음감을 지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왕릉을 만드는 과정을 담은 영상을 지나





효종의 업적을 설명하는 방으로 이동합니다.





병자호란에서 조선이 청에 항복하고 군신관계를 맺으면서


효종은 형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다 조선으로 돌아와 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효종은 청나라를 치자는 이른바 북벌론을 들어 군대를 개편하는 노력을 벌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북벌이 이뤄지지는 못했는데,


조선과 청나라의 국력차이는 둘째치고


효종이 장자가 아니라서 생기는 정통성 논란을 북벌로 덮어 지방 유림의 지지를 받고자 했을 뿐


실제로 청나라를 공격할 의지가 없었다는 시각이 우세합니다.





정작 조선이 청을 치겠다며 갈고 닭은 군대는


청나라의 요청으로 러시아를 치는 나선정벌에 파병됐습니다.


참 아이러니하죠.





북벌 이외에 효종의 업적을 꼽자면 민생안정을 들 수 있습니다.


영의정 김육의 건의로 지역 특산물을 바치는 공물을 쌀로 대신 내는 대동법을 호서 지방에 실시했고,


호서 지방에 대동법이 성공적으로 정착된 덕분에 후대에 대동법이 조선 전역으로 확대 실시됐죠.


이외에 인조 때 유통에 실패한 상평통보를 다시 주조해 대동법과 연계한 유통을 시도했고,


오늘날 음력이라 부르는 시헌력을 받아들였습니다.





조선을 서양에 알린 하멜표류기의 저자 헨드릭 하멜과 그의 일행이


조선에 표류했던 시기도 효종때입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서기로서 나가사키로 향하던 중 폭풍을 만나


제주도로 떠밀려와 타지에서 고생을 하게 되죠.


이 과정에서 하멜과 마찬가지로 동인도 회사 직원 출신 표류자인 얀 야너스 벨테브레(박연)을 만나기도 합니다.





정규 전시는 이것으로 끝인데 기획전시실이 있네요.





기획전시 제목은 '조선국왕의 즉위식'입니다.





세종은 조선 4대 국왕이지만 그때까지 국가의례 규정이 딱히 정해진 것이 없었고


중국의 황실이나 제후와 관련된 행사를 모방하는데 그쳤습니다.


그래서 세종이 즉위식을 준비하면서 조선 왕 중 처음으로 예법을 정리하도록 명했죠.


하지만 왕이 하는 일이 생각보다 많고 복잡해서 예법을 정리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고


예법 정리는 세종 즉위로부터 한참 뒤인 성종때에 이르러서야 국조오례의 출간으로 끝납니다.





전시실에는 왕 즉위식에 쓰인 복장과 병풍 등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건물 밖으로 나가 훈민정음 관련 조형물을 둘러본 뒤





버스를 타러 또 한참을 걸어 갑니다.





영녕릉에서만 대체 몇m를 걷는건지...





아무튼 버스를 타고





세종대왕릉 삼거리에 놓인 분수를 보다 여주시내로 이동합니다.




수도권 전철 여행 지도

K418. 부발역

감자탕 한 그릇

K419. 세종대왕릉역

K420. 여주역

대로사(강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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